지난 해 교양으로 들었던 '영화의 이해' 과목에 제출했던 레포트.
지금 읽어보니 별 것 아닌데, 당시엔 '나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에 버금가는 고민거리였다.
A+ 받았다는 사실에 믿기지 않으면서 무척이나 뿌듯하던..
문득 생각이 나서 올려본다.
제출일 08. 12. 01
영화 <졸업>에서의 시각 언어와 등장인물 간의 갈등구도
영화 <졸업>을 보는 내내 내가 받은 느낌은 불안감과 위화감이었다. 이러한 시각적이고 정서적인 불편함에는, 일단 1960년대 영화의 특징이며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얕은 포커스와 클로즈 업 샷이 한 몫을 하였을 것이고, 그 외에도 종종 사용된 핸드 헬드 샷과 더치 앵글 샷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름대로 많은 영화를 접해온 나에게는 가히 평범하지 않은 인물의 배치들이 너무도 자극적이고 불편하였다. 이 영화에서는 전반적으로 일반적인 투 샷이나 쓰리 샷과는 상당히 다른 인물 배치가 많이 사용되었다. 자연스레 이러한 요소들에 집중을 하게 되었고, 이는 필시 이를 통해 특정한 효과를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벤자민의 졸업 축하 파티 장면에서 대부분의 샷은 클로즈 업으로 잡히고 포커스가 벤자민의 얼굴에 맞추어져 잡혀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벤자민의 혼란스러운 심리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나는 그와 동시에 감독이 벤자민 외의 다른 인물들을 공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우선 도입부의 벤자민과 아버지의 대화 샷을 보자. 어항 앞에 앉아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벤자민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되어있고, 포커스 또한 벤자민에게 맞추어져 있다. 곧 아버지가 등장하여 벤자민의 앞쪽에 앉지만, 카메라는 줌 아웃 되거나 포커스가 이동하지 않는다. 또한 벤자민과 아버지의 거리는 굉장히 멀게 느껴지며, 벤자민의 아버지의 머리는 비정상적으로 크게 잡힌다. 결과적으로 벤자민의 아버지는 화면의 반 가까이 차지하면서도, 포커스가 아웃되어 거칠고 불명확한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게다가 비교적 롱 테이크로 촬영된 이 샷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벤자민의 아버지의 모습은 대부분 뒷통수이며, 심지어 이 뒷통수는 포커스가 맞춰진 벤자민의 얼굴을 가리기도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 마치 영화관에서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머리가 내 시야를 가리는 듯한 일종의 불쾌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렇다. 이는 의도된 불쾌함이다. 이 샷에서의 벤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명확하게 표현되지도 않은 거대하고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서 그의 공간이 침범당하고 있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 또한 벤자민과 마찬가지로 불쾌함과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벤자민의 불안한 심리와, 그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무언가를 강요하는 부모님과 손님들의 태도는, 핸드 헬드와 클로즈 업, 얕은 포커스 외에도 이러한 독특한 인물 배치에 의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각적 장치는 이어지는 파티 신에서 계속 보여진다.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포커스는 로빈슨 부인에게 맞춰져 있다.(11분 15초 무렵) 반면에 벤자민은 포커스가 나간 채로 뒷통수만이 보여지거나, 조명을 받지 못하여 어둡게 처리된다. 그리고 카메라는 벤자민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이동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로빈슨 부인의 능글맞은 웃음과 도발적인 자세이며, 벤자민은 그의 격양되고 초조한 어조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벤자민이 오해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을 유혹하고 있는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사전에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벤자민은 물론 관객 또한 혼란스러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씬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무의식중에 벤자민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비록 직접적인 1인칭 시점은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는 벤자민의 시점 가까이에서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직시하게 되고, 로빈슨 부인의 태도와 말로부터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내고자 집중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어렴풋이 드러나는 벤자민의 모습과 우스꽝스러운 태도를 무의식중에 인식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직접적인 1인칭 시점으로 표현되었을 때보다 더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러한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의 이러한 비정상적인 인물 배치는, 벤자민의 긴 고민과 끝에 두 사람이 호텔에서 첫 밀회를 즐기게 되면서 비로소 정상화 된다. 카페테리아 테이블에 비친 벤자민의 공간에 로빈슨 부인이 들어오고, 카메라가 틸팅 되면서 둘의 모습은 일반적인 투 샷의 배치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는 순간, 즉 벤자민이 침대 위에서 일레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시점에서 이들의 배치 역시 다시금 뒤틀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며 심리적 갈등을 겪고 있는 로빈슨 부인을 보여주며, 벤자민은 화면 밖으로 사라진 채 목소리만을 들려준다. 둘의 말다툼은 지속되고, 두 세개의 샷이 이어진 뒤, 이번에는 로빈스 부인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감정에 복받친 벤자민 만이 보여진다. 이어진 샷에서는 로빈슨 부인이 벤자민을 유혹하던 신과 마찬가지로, 로빈슨 부인에게 포커스가 맞춰지고 벤자민의 모습은 조명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또다시 로빈슨 부인에게 집중을 하게 되며, 가터벨트를 착용하며 묘한 미소를 짓는 로빈슨 부인의 모습을 보며 그녀가 벤자민을 기만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표면상으로 둘의 갈등은 마무리 지어지는 듯 하지만, 샷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이 화면의 양쪽 끝에 위치하여 서로 등을 지고 옷을 벗는 장면은, 둘 사이의 관계가 이미 돌아올 수 없으리만큼 소원해졌음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벤자민과 일레인의 데이트 시퀀스에서는, 벤자민이 차에서, 유부녀를 만나고 있음을 고백하는 신에 주목해 볼 필요성이 있다. 이 신에서 벤자민은 화면의 오른쪽에 위치하며 포커스가 나가있고, 화면 중앙에 위치한 일레인은 포커스는 맞춰져 있으나 오른쪽 눈과 이마 언저리가 차에 가려져있다. 이 비정상적인 프레임에서 분명히 우리의 시선은 일레인에 맞춰지게 된다. 하지만 계속 다른 곳만을 응시하는 벤자민과는 달리 관객은 그녀의 미묘한 표정변화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 일부분이 지속적으로 가려져있음으로써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이 답답함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벤자민에 대한 일레인의 답답함과, 둘 사이의 관계가 순탄치 못할 것임을 예상하게 되는 관객의 답답함을 모두 대변한다. 이어서, 일레인이 벤자민에게 다 끝난일이냐고 묻는 부분에서는 미묘하게 어긋난 샷 전환이 이루어지고, 잠시 우리는 ‘그래’라고 대답하는 벤자민의 표정을 보게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의 자동차 안 대화 신에서는 둘 사이의 단절감이 명확히 드러난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이들은 한 프레임 안에 잡히지 않은 채, 두 사람 각각의 얼굴이 교대로 비춰진다. 또한, 이어지는 차 정면 방향에서 찍은 샷에서 두 사람은, 한 프레임 안에 잡히지만 정면만을 응시한 채 대화를 나눈다. 이러한 비언어적 정보 전달을 통해 우리는 무의식중에 인물 사이의 갈등관계를 시각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시각언어는 일레인이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의 관계에 대해 알아차리는 신에서 절정을 이룬다. 하필이면 벌어진 문틈을 일직선상에 놓고 혼란스러운 대화를 나누던 벤자민과 일레인(벤자민-일레인)의 뒤편으로 로빈슨 부인이 나타나고, 카메라는 벤자민 쪽에서 일레인과 로빈슨 부인을 동시에 잡는다.(벤자민, 일레인-로빈슨 부인) 벤자민의 시선을 눈치 챈 일레인이 로빈슨 부인을 바라보면서, 일레인에게 맞춰져 있던 포커스는 로빈슨 부인에게로 이동하고, 로빈슨 부인이 슬픔 가득한 표정으로 떠나고 난 뒤 다시금 일레인에게로 이동한다. 이 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인물의 배치 또한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세 사람의 구도는 삼각형에 가까울 것이다. 방 안쪽에서 대화하는 벤자민과 일레인의 투 샷이 클로즈 업으로 보여지고난 뒤, 그 사이에 놓인 방문으로 로빈슨 부인의 모습이 나타나고, 포커스가 방문 쪽으로 이동되었다가 로빈슨 부인이 떠난 뒤 다시 벤자민과 일레인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이 세 사람을 일직선상에 배치한 것은, 일종의 양자택일성을 전달하려함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좌측과 우측의 거리감이 비교적 비슷하게 마련인 삼각형 구도와 달리, 직선상에서 포인트와 포인트 간의 거리는 보다 확연히 구분된다. 끝에 위치한 벤자민에게 일레인은 가깝고 로빈슨 부인은 멀며, 일레인에게도 벤자민은 앞쪽에 있고 로빈슨 부인은 뒤쪽에 위치한다. 포커스의 이동을 통한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복잡하고 극단적인 갈등관계는 이 구도만으로도 확연히 표현된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난 뒤에는, 도대체 이 정도의 영화가 어떻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았는지 의아했었다. 아카데미와 감독상의 평가 기준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렇다 할 뚜렷한 주제의식이나 개성있는 작품세계도 뛰어난 연출력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익숙하지 않은 인물 배치와 억지스러운 내러티브 전개, 과도한 클로즈 업 샷들만이 나를 괴롭혔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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